종강을 하고 쓸쓸해졌다.
학교에 가서 동기들과 실없는 드립을 치며 밤새 벼락치기를 하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기억을 끄집어내며 기말고사를 치르고 나니
자연스럽게 종강이 다가왔다.
종강을 일찍 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홀로 있는 것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또 막상 혼자 있으려니 쓸쓸해졌다.
책을 펼쳐도 읽는 것에 신물이 났는지 눈에 안들어오고,
게임이나 유튜브는 시험기간이 끝나고 나니 귀신같이 재미가 없어졌다.
근질거리는 몸, 근데 또 운동은 하기가 싫다. 다음주부터 할게.
그래서 일단 걸었다. 목적지 없이 발이 이끄는대로.
여름 날씨의 오후를 한참 걷다가땀을 식힐 곳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4년 만에 간 만화방에서 친구의 추천을 받고 <피의 흔적>이라는 만화를 읽었다.
줄거리

사춘기, 어른이 된다는 것, 부모와의 관계, 나는 누구의 것인가
줄거리를 요약하자면 위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들 세이치

1981년 3월 19일에 태어난 세이치는 평범한 초등학생이다.
학교에 가기 전에 엄마가 깨워주며 아침을 해주고, 학교에 가서도 친구들과 장난도 치며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듯 보인다.
하지만 조금씩 비틀린 면들이 드러난다.
주변 친구들은 조금씩 부모의 통제에서 벗어나며 방과후에 무리지어 다니기도 하고, 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하지만 세이치는 엄마의 '과보호'를 받으며 착한 아이 컴플렉스에 걸린 것만 같다.
중학생이 되어서도 엄마의 품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책임감과 죄책감 사이에서 비극적인 경험을 겪는다.
엄마 세이코

엄마 세이코는 가정적이고 헌신적인 아름다운 여성이다.
하지만 클리셰대로, 세이코는 엄마라는 역할에 갇혀 자신을 잃어간다는 피해의식이 있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아픔,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어린 시절...도쿄에서 만나게 된 이치로와 그의 고향으로 가서 가정을 이루게 된 일,이방인으로서 그의 가족들과 섞이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한 일,아이를 낳으면 엄마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던 일까지.
세이코는 인생의 권태기를 겪고 있었던 것 같다.
관계성으로 정의되는 자아
이런 세이치와 세이코의 모자 관계는 비정상적인 것만 같다.
보여주는 것을 다 믿을 수 없는 정신착란적인 장면들을 통해사랑이라는 감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사춘기를 겪으며 동급생에게 설레는 감정과, 자신을 늘 보살펴준 엄마에 대한 감사한 마음 사이에서사랑이 무엇인지 헷갈려하는 것만 같다.


서로가 서로의 전부가 될 수 없다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덮어놓으려 했던,
그럼에도 결국에는 결코 끊어낼 수 없는 가족의 연을 발견하며 끝난,
한 가정의 탄생부터 죽음까지의 인생을 비극적으로 그려낸 작품이었던 것 같다.
후기
이 작품이 가스라이팅, 근친, 얀데레 등의 키워드로 많이 알려진 것 같다.
그런 자극적인 요소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작품이 맞긴 하다.
하지만 막연히 자극적인 충격을 주기 위한 의도로 느껴지지 않았다.오히려 개인의 경험을 빗댈 수 있는 주제의식을 강렬하게 전달하기 위한 연출의 일환인 동시에, 과도한 몰입을 막으며 철저히 제3자의 위치에서 세이치와 세이코에게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영리한 장치라고 느껴졌다.
정신착란적인 고어한 연출이 인상 깊었고, 그 덕분에 덧없는 결말의 여운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허무주의적 카타르시스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추천한다. 뒤틀린 모자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꽤 매력적인 소재로 다가올 것 같다.
반대로 실증적 사고를 즐기며 올바름(Correctness)에 대한 신념이 강한 사람은 굳이 읽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후기 맨 처음에 언급한 키워드들이 불편하게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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